
입소문만으로 50억이 팔리는 ‘광고 금지 품목’
섹슈얼 헬스케어 브랜드, 이브를 만드는 인스팅터스 박진아 대표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 인스팅터스 박진아 대표는 스스로 반골이라 생각할 만큼 당찬 대학생이었습니다. 당연시되는 관습에 꾸준히 질문을 던지다 ‘콘돔=성인용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며 섹슈얼 헬스케어 브랜드를 만드는데요.
물론 시작은 쉽지 않았습니다. 10대 피임권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첫 콘돔 쇼핑몰 ‘부끄럽지 않아요’는 하루에 5개도 팔리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고 합니다. 박진아 대표는 이 경험을 통해 상품 자체로 효용과 가치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브랜드, 이브를 론칭하죠.
낡은 시장과 고정관념에 맞서며 콘돔 업계의 새로운 흐름을 연 인스팅터스는 이제 연 매출 50억 원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곧 경쟁력이라는 박진아 대표의 이야기를 EO가 들어봤습니다.
인스팅터스 박진아 대표 인터뷰
Q. 자기소개와 함께 인스팅터스가 어떤 회사인지 소개해주세요.
인스팅터스의 대표를 맡고 있는 박진아입니다. 인스팅터스는 2015년 2월에 설립된 법인으로, 생식기에 닿는 모든 것을 더욱 건강하게 만드는 섹슈얼 헬스케어 브랜드, 이브를 운영하는 스타트업이에요. 지금까지 6개의 콘돔과 두 종류의 러브젤, 외음부 세정제와 생리컵, 생리 팬티 등의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성을 건강의 스펙트럼에서 바라보고, 성을 인식하는 패러다임을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사업을 운영하고 있어요. 2019년을 기준으로 연 매출 50억 원을 달성했는데, 창업 초기부터 많은 어려움 끝에 달성한 재무제표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섹슈얼 헬스케어 브랜드라는 정의가 인상 깊었는데 처음 창업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맞서는 기질이 있는 아이였어요. 약간 반골 기질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태도가 가장 많이 드러난 게 성의 영역이었던 것 같고요.
가장 처음 시작했던 사업은 ‘부끄럽지 않아요’라는 쇼핑몰이었어요.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10대 피임권에 대한 인식을 바꿔보자는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실패작이었어요.
그때가 2013~2014년 무렵이었는데 탐스라는 신발 브랜드가 굉장히 유행이었거든요. 신발 한 켤레를 사면 한 켤레가 기부되는 구조로 인기를 끌었죠. 탐스의 기부 전략을 ‘부끄럽지 않아요’에도 적용해서 성인이 구매하는 콘돔만큼 청소년 성교육용 교구로 콘돔을 기부하는 모델을 만들었어요.
하루에 5개만 주문이 들어와도 박수를 치면서 택배를 쌌는데, 그러다 보니까 월급은 고사하고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까지 써야 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 거예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했던 거죠. 우리의 선의를 사람들이 좋아해 줄 거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시작한 전략이었다고 봐요.
그 경험을 통해 아주 강하게 깨달았어요. 예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누군가 쉽게 지갑을 여는 건 아니라는 걸, 돈을 벌려면 예쁜 마음으로는 부족하고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편익이 돌아가야 한다는 걸요. 그러기 위해선 차별화와 경쟁력이 필수라는 걸 제대로 느꼈죠.
그래서 이다음에는 제품 소비 자체가 가치의 확산이 되도록 구조화해보자고 결심했어요. 그 결심이 지금의 이브라는 브랜드를 만들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고요.
Q. 이브의 핵심 가치가 ‘건강, 자연, 평등’이죠.
맞아요. 피부에 바르는 화장품은 성분 검색 전용 앱을 사용할 만큼 성분을 엄청 따지잖아요. 그런데 콘돔은 몸의 가장 민감한 곳에 닿는 제품인데도 안전성에 대한 니즈가 반영되지 못한 상태였어요. 심지어 콘돔은 의료기기인데도 그런 니즈가 업계에서 배제되어 있더라고요.
좀 더 건강하고, 자연에 가깝고, 평등한 가치를 우리 제품에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생식 건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브랜드로, 자연을 닮은 제품을 지향하고 안심하고 쓸 수 있는 성분 안전성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코스메틱 업계를 많이 참고했어요. 워낙 취향이 많이 담기는 시장이기도 하고 패키징이나 브랜딩 같은 제반 상황이 탄탄하게 발전한 시장이라 많이 참고했죠.
일단 성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전 세계의 콘돔 관련 논문을 읽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니트로사민에 대해 알게 됐죠. 고무 가공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인데, 이게 발암물질이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발암물질이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을 만들어 ‘건강’이라는 가치를 제시해보자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어요. 일단 자금이 부족했어요. 사업 아이템이 콘돔이라 그런지 지원 사업도 서류 단계에서 전부 광탈했죠. 결국 엄마가 모아둔 결혼 자금까지 가져왔어요. 그렇게 알음알음 모은 돈 몇천만 원으로 전 세계의 콘돔 제조사에 콜드 메일을 뿌렸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스펙은 이건데 자금이 부족해서 최소 생산 수량이 조금 적었으면 좋겠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다 씹혔죠. 딱 한 군데, 현재 저희의 제조사에서 답변이 온 거예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2015년 10월에 첫 제품이 통관됩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맞춰 무료배송 이벤트를 열었는데, 하루에 주문이 100건씩 들어오는 거예요. 너무 신기했어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확인한 경험이잖아요. 내 생각이 적중했다는 데서 오는 엄청난 희열이 있었어요. 첫 단추를 잘 끼워본 경험은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뿜어내거든요.
결국, 이브가 추구하는 가치가 시대정신에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브의 여러 제품들
Q. 본격적으로 콘돔 시장을 파고든 이브만의 차별화와 경쟁력은 무엇일까요?
콘돔 업계에 큰바람이 분 적이 있어요. 업계 1, 2위 브랜드에 도덕적 문제가 발생하면서 돌풍이 분 건데요. 한쪽은 굉장히 비극적인 사고로 불매의 대상이 된 대기업의 계열사였고, 다른 한쪽은 전범 기업이었어요. 그 바람에 굉장히 많은 소비자가 새로운 선택지를 찾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장에 큰 변동이 왔을 때 인스팅터스만의 접근을 시도했어요. ‘콘돔은 우리 몸 가장 예민한 곳에 닿는 제품이에요. 더 건강한 제품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친밀한 순간에 사용하는 제품이라면 이것 또한 배려이지 않을까요?’라는 식으로 소비자에게 접근했죠.
이커머스로 판매를 진행하니까 고객 반응이 바로 오더라고요. 아내를 위해 좀 더 좋은 제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고맙다는 댓글이 달렸죠. 고객의 반응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이커머스의 장점이거든요. 이런 후기를 통해 사람들이 더 건강한 성을 지향하고 이를 향한 의지가 있다는 걸 확인했어요.
하지만 성분을 위해 성감을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기존 콘돔 시장에 얇은 두께로 어필하는 브랜드가 워낙 많다 보니까 그 부분도 놓칠 수 없었죠. 이런 아이디어와 노력 역시 고객 반응과 의견을 참고했어요. 그렇게 출시한 제품이 지금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리얼 003라인이에요. 아주 효자 상품입니다.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이야기하면서 제품을 만들 때 소비자의 니즈를 충족하는 제품을 내놓는 건 아주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마땅한 기본 위에, 브랜드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를 차별화 포인트로 얹어야만 좋은 반응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브는 콘돔과 윤활제 시장에서 처음으로 ‘건강’이라는 새로운 소비 기준을 제시했잖아요. 이브만의 차별화이자 경쟁력이죠.
개인적으로는 모방이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해요. 시장에서 하나가 잘 되면 누구나 카피하거든요. 그래서 엄청 고심했던 우리 카피를 그대로 베껴 쓴 브랜드를 보면 기분이 나쁘면서도 좀 신기해요. ‘이게 통했나 보다. 그럼 다음 스텝으로 뭘 하지?’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의 차별화를 구축할지 늘 고민합니다.
인스팅터스 박진아 대표가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했던 칼럼들
Q.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며 콘돔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지만, 초반에는 마케팅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어요.
저희는 초기부터 입소문으로 성장했어요. 보통 스타트업에서 초반 마케팅 도구로 SNS 광고를 가장 많이 활용하는데, 저희는 사업 아이템이 콘돔이라 SNS 광고를 할 수 없었어요. 페이스북에서도 전부 금지하거든요. 보통의 스타트업이 당연하게 가져가는 도구를 활용할 수 없었던 거예요.
직관적으로 이런 상황은 콘텐츠를 통해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희 제품에 담긴 복합적인 철학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직접 쓰는 콘텐츠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사실 그것밖에 할 수 없기도 했고요. 또 텍스트 콘텐츠를 기반으로 사업을 알렸던 ‘부끄럽지 않아요’의 경험도 도움이 될 거라고 봤습니다.
2020년 인스팅터스에서 발행한 섹스 성향 테스트
가장 대표적인 콘텐츠가 작년에 발행한 섹스 성향 테스트예요. 섹스 성향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콘텐츠로, 정욕의 섹시오패스나 섹스계의 흥선대원군처럼 재치 있게 표현했더니 하루에 몇십만 명이 사용할 만큼 반응이 좋았어요.
저희 직원 한 분은 어머님과 함께 테스트를 해보셨대요. 어머님께서 테스트 결과가 너무 잘 맞는다고 깔깔 웃으셨다는데, 사실 엄마와 딸이 섹스를 주제로 대화할 기회가 엄청 귀하잖아요. 이런 소중한 순간이 테스트를 이용한 100만 명의 사용자에게도 있었겠구나 싶더라고요.
처음 테스트를 만들 때는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성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도 어려운데, 재밌으면서도 차별적이지 않게 만드는 건 훨씬 더 어렵거든요. ‘누군가를 배제하지는 않았을까? 그렇다고 너무 재미가 없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해야 했죠.
Q. 나이나 성별, 성적지향 등에 구분 없이 평등함을 추구한다는 브랜드 가치가 콘텐츠에서도 잘 드러난 것 같습니다.
고민을 정말 많이 했거든요. 치열한 가치 갈등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발견한 곳은 결국 인스팅터스에 있는 분들이 아닐까 싶어요. 인스팅터스에서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거든요.
최근에 재직자분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동료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가 가장 큰 복지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어요. 성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차별하거나 편견을 가지거나 프레이밍 하지 않을 거라는 신뢰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점이죠. 그런 사람이 모인 공간은 더 귀하고요.
회사 차원에서 ‘차별적인 언어보다는 중립적인 언어를 써주세요’라는 수준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는데, 이 가이드라인 안에서 성에 대해 즐거우면서도 차별 없이, 안정감 있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은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 이런 소통의 범위가 사회 전체로 확장되는 걸 어느 정도 꿈꾸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창업을 하면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케이스라 처음에는 모르는 게 너무 많았어요. 모르는 게 많은 경영자는 기성 방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어느 정도의 혼란을 드릴 수밖에 없다는 단점도 있거든요.
그 점이 좀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저는 기업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개인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까요. 인스팅터스는 창업 초기부터 사회에 좀 더 나은 가치를 제시하는 존재가 되고 싶었고, 그걸 가장 재밌게 표현하는 방식이 후원이나 기부라고 생각해서 브랜드 가치와 관련된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Q. 청소년을 위한 제품 기부부터 퀴어퍼레이드 후원까지 매해 매출액의 1%를 후원하고 계시죠. 사회적 활동에 적극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내가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사람과 단체를 후원한다는 건 굉장히 재밌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성 소수자와 관련된 주제는 국내에서 특히 많은 논쟁이 일어나지만, 제 관점에서 보면 퀴어퍼레이드 역시 제가 살고 싶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분들이 모인 축제예요.
이런 부분 때문에 가끔 ‘제품은 너무 좋은데 왜 퀴어퍼레이드를 후원하냐’라는 내용의 메일이 오기도 해요. 인스팅터스가 취하는 태도와 반대 의견을 보내주시는 고객님도 계시는 거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반골 기질이 있어서 사업 초기만 해도 내 생각이 옳다는 믿음이 너무 강했어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제가 인지하는 세상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이제는 그런 오만함을 조금 버린 것 같아요.
지금은 ‘내가 생각하는 옳음이기 때문에 추구한다’라는 데 좀 더 가까워졌어요. 우리 사회가 내가 생각하는 옳음에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기여한다는 데서 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이 기쁨은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스팅터스 박진아 대표
Q.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요즘 ESG가 트렌드잖아요. 사실 소셜 섹터에서는 굉장히 오래된 문제의식이에요. 인류가 좀 더 영속 가능한 사회를 꾸리기 위해서는 기업이 이런 문제의식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문제 해결을 위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선순환이 가장 이상적인 경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작년부터 저희 회사에 SEIM 파트를 도입했습니다. SEIM 파트는 사회(Social), 환경(Environmental), 영향 관리(Impact Management)라는 뜻을 가진 별도 부서인데요.
이 부서는 지속 가능 경영을 위한 방향이 지켜지고 있는지, 회사의 지표들이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관리하는 일을 맡습니다. 예를 들면 제품 생산 과정에서 탄소 배출량을 얼마나 줄였는지 체크하는 거죠. SEIM 파트를 통해 우리 회사가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진실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걸 알리고 싶어요.
또 철학을 가지고 기업을 운영한다는 게 경쟁력일 수 있다는 걸 세상에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기업으로서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결국 재무제표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사회적 가치를 지켜도 매출이 나온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앞으로도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곧 경쟁력이 될 수 있다는 걸 꾸준히 증명하는 브랜드가 되고 싶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소비자분들이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을 조금 더 예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본 아티클은 2021년 5월 공개된 <입소문으로만 50억이 팔리는 ‘광고 금지 품목’>의 내용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옳음’의 가치로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를 동시에 실현하는 인스팅터스의 대표, 박진아 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만나보세요.
글·편집 이영림
EO(Entrepreneurship & Opportu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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