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간다는 것


실리콘밸리에서 비서이자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카운실 김혜진 경영진 비서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에서 김미소 비서(박민영 분)는 그룹 부회장 이영준(박서준 분)을 보좌하며 별의별 것을 다 합니다. 꽃 알레르기가 있음에도 영준이 파티에서 만난 여자에게 선사할 꽃다발을 사 오기까지 하죠.

서스펜스를 가미한 노골적인 로맨틱 코미디물이니 진지하게 볼 필요는 없지만, 실제로 그런 사적인 일들도 비서의 일이 될 수 있을까요? 바이오 테크 회사 카운실에서 경영진 비서로 일하고 있는 김혜진 님은 적어도 실리콘밸리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비서이자 이제 3살이 된 딸 아이를 키우고 있는 워킹맘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이야기를 만나보시죠.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실리콘밸리에서 20개월 된 딸과 10살 된 개 루루를 키우고 있는 워킹맘 김혜진입니다. 바이오 테크 회사에서 경영진 비서로 일하고 있고요. 과학 연구 팀과 엔지니어링 팀 서포트하고 있습니다.

Q. 아이가 태어난 후에 구직활동을 해서 지금 회사에 들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아이가 6개월 정도였는데도 구직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편견 없이 사람을 뽑는 절차 덕분에 가능했던 것 같아요. 면접을 보는데 아기가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인종이 무엇인지, 어디서 태어나서 자랐는지 이런 걸 물어보면 법에 걸리거든요. 아예 그런 것들은 질문하지 못하도록 회사에서 인터뷰하는 사람들을 트레이닝하는 교육도 있어요.

Q. 실리콘밸리에서 그런 문화가 정착된 이유가 있을까요?

한때는 슈퍼 맘 신드롬이 있었잖아요. 일도 잘하고 아이도 야무지게 키우고 가정 안에서 일도 잘하는 사람들을 슈퍼 맘이라고 하면서 우상화하는 시대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여성들도 일할 때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시스템을 잘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Q.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이 있을까요?

대표적으로 저희 회사에서는 여성 지원 모임이라는 그룹을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는데요. 저희 회사가 가고 있는 방향에 맞춰서 ‘사람들을 어떻게 일을 잘하게 할까? 어떻게 편하게 할 수 있을까?’를 서포트하는 여러 기구 중의 하나입니다.

아기가 아프면 회사에 못 가는 경우도 많이 있고, 아이 데이케어 방학이 일주일씩 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때 회사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예를 들면 원격으로 미팅을 할 수 있게 하거나 그 기간에는 만나서 해야 하는 미팅을 미루거나 미리미리 계획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직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아이가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고, 결혼을 안 한 사람도 있고요. 성 정체성도 되게 다양해서 모든 사람들을 ‘여성’ 하나로 묶어서 얘기할 수는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각자의 니즈에 맞추기 위해서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지를 얘기하다 보면 남성들도 자연스럽게 들어와서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요.

Q. 여성을 위한 지원 말고 다른 것도 있을까요?

저희는 임원들이 항상 매달 정기 회의에 참여하고, 그 시간에는 아무것도 잡지 말아 달라고 얘기를 해줘요.

그리고 다른 회사는 어떤 정책을 가지고 있는지를 배우기 위해서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지원해서 컨퍼런스에 보내주기도 해요. 갔다 온 사람들이 와서 다른 회사의 정책을 우리 회사에 적용하면 좋겠다거나, 우리의 정책이 다른 회사에 굉장히 많은 영감을 줬다는 식의 피드백을 서로 받으면서 계속 발전시켜 나가는 거예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그렇게 다양성을 포용하는 결국에는 회사가 더 좋은 인재를 끌어들여요. 제품을 만들 때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면, 한 종류의 사람들은 못 보는 것들을 굉장히 많이 볼 수 있어서 글로벌 프로덕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회사들이 이런 다양성을 포용하려는 노력을 굉장히 많이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Q. 원래부터 비서직을 희망하셨던 건가요?

제가 비서로 처음부터 커리어를 시작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 하고 싶었던 일은 간호사가 되는 거였는데, 바이오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2년 동안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바이오 전공 관련된 많은 수업을 들었어요.

그러고 나서 실리콘밸리에 넘어왔는데 다들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코딩 스쿨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6개월 정도 코딩 공부를 한 다음에 졸업했죠.

이후에 코딩 스킬과 유전자 공부한 것들을 접목시켜서 여러 사람과 일하는 분야를 찾아보다가, 주변에서 EA(executive assistant, 한국에서는 ‘비서’로 통칭)라는 직업을 추천해주더라고요.

무슨 일을 하는지를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면접을 보려면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한국에 있는 직무기술서부터 찾기 시작했어요. ‘용모 단정한 사람,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 이렇게 설명이 없는데 도대체 무슨 일을 할까 해서 기사랑 블로그에서 잔뜩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 자료들에서는 ‘5분 대기조’, 즉 눈치 빠르게 척하면 척 알아들어야 해서 신경을 항상 곤두세우고 보좌하는 분의 비위에 맞춰서 일을 잘하는 게 되게 중요한 덕목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비서의 역할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하게 됐죠.

Q. 한국의 문화와 미국의 문화가 다르다 보니, 비서라는 직무에도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당연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 차이가 뭔지 잘 몰랐어요. 그래서 일단 미국에 있는 직무기술서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너의 역할은 ~이다’, ‘~를 제안해라, ~를 관리해라, ~를 지원해라, ~를 체계화해라’ 이런 식으로 뭘 하는지 정확하게 나와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다 비슷한 이야기구나’ 싶어서 무작정 면접을 봤어요.

그런데 진짜 하나도 빠짐없이 다 떨어지는 거예요. 나중에 왜 떨어졌는지 물어보니 면접을 볼 때 제가 아니라 남의 얘기를 듣는 것 같았다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예를 들어, 제가 A라는 회사의 인터뷰를 봤다면 A사에 대해서 다 외워서 그 회사에 맞추는 식이었던 거죠. ‘무조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성실하게 일하겠습니다’, ‘잘 못 하지만 진짜 빨리 배우고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계속 이렇게만 얘기를 한 겁니다.

Q. 실리콘밸리의 조직들은 면접에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 사람들이 면접에서 원한 건 제가 어떤 스타일로 일을 하는지 확인하는 거였더라고요. 허드렛일을 잘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라, 조직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길 원했다는 거죠.

생각해보니 그 얘기를 할 때 사람들이 ‘쟤가 이 직무를 잘 이해를 하는 건가? 왜 저런 얘기를 하는 거지?’ 싶은 표정을 지었던 거에요. ‘내가 편하자고 너를 고용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네가 해결하고, 너의 역할을 통해서 내가 하루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하려는 거지, 잔심부름시키려고 뽑는 게 아니다’라는 피드백을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는 비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작업부터 시작했어요. 직무기술서의 내용을 하나하나 보면서 ‘나는 이런 경험을 해서 여기에 맞고, 나의 경험이 충분하다고 생각해’라는 식으로 생각하며 정리한 내용을 가져간 거예요. 그리고 면접장에서 거꾸로 면접관들에게 이렇게 물어봤어요.

“너는 요즘 어떤 게 힘들어? EA 새로 뽑으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게 뭐라고 생각해? 내가 이 회사를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이 회사에 네가 남아 있는 이유가 뭐야? 가장 큰 가치가 뭐라고 생각해?”

한 채용에서는 직무기술서에 R&D(연구개발) 부서 회의에 들어가서 회의록을 써야 한다고 쓰여 있는 거예요. 내가 유전자를 조금 공부하긴 했는데 전문 용어를 다 이해할 만큼 충분히 지식이 없으니까 아마 첫 한두 달 동안은 내 회의록이 엉망일 거라고 말했어요.

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지, 어떤 팀이랑 먼저 일을 해보면 도움이 되겠는지도 물어보니까 이 부서의 어떤 직원이랑 이야기해보면 저한테 기초적인 것들 다 얘기해 줄 수 있을 거라며 조직도를 쫙 그려주면서 얘기해 주더라고요.

그러면서 회사에 들어가기 전부터 내가 여기 들어가면 누구랑 어떤 일을 할지 알 수 있으니까 정말 좋더라고요. 그렇게 면접을 봐서 여러 회사에 붙었고, 그중에서 제가 제일 마음에 드는 곳에 입사했죠.

Q. 실리콘 밸리에서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삶은 어떤가요?

처음에 들어갔을 때 너무 충격적이었던 게 사람들이 회사 캘린더에 아이 이름을 써놓은 거예요.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는 ‘내 아이 데이케어 데려다주기’, ‘오후 4시부터 6시까지는 아이 데이케어 데려오기’, ‘6시부터 8시까지는 패밀리 타임’ 등 가정의 얘기를 써놓는 거예요.

‘이 사람만 그런가?’하고 봤더니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쓰는 거예요. 임원만 ‘내 애가 중요해’가 아니라 모든 직급의 사람들이 아이를 케어하는 게 자연스러워서 회사 캘린더에 쓰는 게 아무 일이 아닌 거예요.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결국 모든 사람이 ‘그건 중요해’라고 생각해서인 거 같아요. 저희도 마음 놓고 그 시간에 아이에게 충분히 집중할 수 있으니까 육아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어요. 제가 회사에 들어간 첫날에 밤 11시까지 일했어요. 퇴근하고 집에 가서 일을 한 거죠.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뭐가 그렇게 급했어? 뭐 때문에 네가 11시까지 일을 해야 했어?”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5시에 보낸 메일에 답장을 해야 해서 아이를 재운 다음에 11시까지 일을 했다고 했더니 아무도 5시에 보낸 이메일에 네가 당장 답장하는 걸 기대하지 않는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이미 퇴근을 했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일 회사에서 최상의 컨디션으로 일할 수 있도록 재충전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일을 해서 제가 번아웃 돼버리면 다음 날 회사에서 일할 때 능률이 오르겠냐는 질문을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렇게 일하는 건 프로페셔널이 아니라고 하면서, 아이랑 시간을 못 보내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회사 일 때문에 그랬다가 나중에 후회하면 그건 제 잘못인 거잖아요. 그때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것도 프로페셔널의 굉장히 중요한 덕목이기 때문에 오래 일한다고 누구도 감사해하지도 않고 좋은 성과가 결정되지도 않는다는 얘기를 새겨들었죠.

Q. 실리콘 밸리가 원하는 인재상은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모양의 퍼즐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같아요. 남이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 그 회사가 원하는 인재가 되기 위해서 그 인재상에 맞춰서 자신을 깎아 나가는 게 아니라,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원하시는 곳에서 일하는 기회를 꼭 가지셨으면 좋겠어요.

자신이 정말 잘하는 걸 알려면 좋아하는 일을 여러 가지 해봐야 해요. 조금의 경험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어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역할에 들어가서 커리어를 키울 기회가 많으니까 자기 자신을 아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셨으면 해요.

* 본 영상은 2019년 1월 공개된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며 아이를 키운다는 것 | 바이오테크회사 경영진 비서 김혜진 [리얼밸리 시즌2 EP 14]>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현재 김혜진 님은 온라인 게이밍 플랫폼을 운영하는 로블록스에서 비즈니스 운영 프로젝트 매니저와 경영진 비서로 근무 중입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비서이자 워킹맘으로 살아가고 있는 카운실 김혜진 님의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만나보세요.

 

글·편집 유성호

hank@eoeoeo.net

EO(Entrepreneurship & Opportu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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