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공학도에서 디즈니의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디자인으로 경험을 프레이밍하다, 한승헌 프로덕트 디자이너

보통 사람들은 디자인 하면 일단 무언가 그려내는 것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실제로 디자인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계획’이라는 뜻도 나올 정도로 그 의미가 포괄적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이 특정한 형태를 머릿속으로 구상하는 것이니 계획 같은 단어야말로 가장 적확하게 디자인을 표현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즉, 상황에 적합한 프레임을 짜는 것이 곧 디자이너의 본질적인 업무인 셈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와 비슷하게 인간의 경험을 어떤 틀에 두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말하는 한승헌 님은 LG, 마이크로소프트, 디즈니를 거쳐 구글에서까지 활약 중입니다. 공학을 전공하고도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멋진 커리어패스를 만들어가고 있는 한승헌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시죠.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디즈니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한승헌입니다. 디즈니는 세 번째 직장인데요. 제가 속한 ‘Park and Resort Digital’ 팀은 디즈니랜드, 디즈니월드, 디즈니 크루즈라인, 디즈니 베이케이션 클럽 등 오프라인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디지털 경험을 제공해요. 종이 티켓을 앱 안에 넣어주고,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지루함을 덜어주는 증강 현실 게임을 만들기도 합니다.

Q. 한국에 계실 때는 LG 전자에 다니셨다고 알고 있어요.

한국에서는 산업 공학을 전공했습니다. 디자인과 크게 상관이 없는 분야인데요. 졸업할 즈음에 많은 분이 그렇듯 대학원을 갈지 취직을 할지를 고민했어요. 대학원에 가겠다고 잠깐 생각도 했는데, 그때 디자인 관련 학교를 찾아봤어요. 제가 산업 공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은 해야 하는 것이고 디자인은 하고 싶은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끝내고 나서 디자인 쪽으로 취업을 준비했습니다. 처음엔 계속 떨어졌는데, 면접에 대한 노하우가 어느 정도 생겼을 때 즈음에 LG 전자에서 취업 공고가 딱 난 거예요.

그중 하나가 모바일 UI 디자이너였는데, 당시 팀에 전공이 다른 여러 사람을 데려와서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을 때였어요. 산업 공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디자인을 하고 싶어했던 저도 한 번 지원해봐야겠다 싶었어요. 그렇게 모바일 UI 디자이너로 LG 전자에 입사하면서 디자이너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서로 다른 전공의 사람이 모였다 보니 정작 제품에 적용할 인터랙션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엔지니어, PM, 리서처, 디자이너가 다 같이 참여해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전체적으로 답답할 수밖에 없었어요. 저 역시 공학을 전공했고, 디자인 방법론을 모르다 보니 지식의 한계가 왔어요.

그때 디자인 전공을 해야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은 인터랙션 디자인이 이제 막 발전을 시작하던 때였다 보니 이왕 전공을 하려면 미국에 가서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그전까지 3년 동안 LG 전자에 다니면서 모은 7천만 원으로 유학을 왔는데, 공부를 하려고 온 거다 보니 사실 처음에는 미국에서 꼭 취업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Q. 그렇다면 디즈니에는 어떤 과정을 거쳐 입사하신 건가요?

제가 미국에서 다닌 카네기멜런대학이 학생들을 취직시키는 거로 정말 유명한 학교예요. 그런 환경 속에서 취직해서 돈을 벌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들고 모든 채널로 다 지원했던 것 같아요. 1년 내내 일상의 한 부분처럼 입사 지원을 꾸준히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인턴을 채용할 시기가 됐을 때 즈음에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연락이 왔고, 3년 정도 다녔어요. 그런데 회사에서 무언가 배운 것들이 제가 디자이너로서 성장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마이크로소프트로만 한정하면 승진하는 데 버팀목이 되고, 유용하게 쓰일 만한 것들이긴 했지만요.

마이크로소프트에 있다가 디즈니로 이직한 계기는 시애틀에서 열린 프레이머 밋업이라는 행사였습니다. 프레이머는 디자이너들이 많이 쓰는 인터랙션 프로토타이핑 툴이고, 프레이머 밋업은 ‘우리 회사에서 프레이머로 이런 걸 만들었어’ 아니면 ‘프레이머 잘 모르는데 가르쳐줘’라고 어필하는 사람들이 오는 행사예요. 그때 디즈니에서도 누가 와서 발표를 했는데, 내용이 신세계처럼 느껴져서 관심이 갔어요.

디즈니에서 온 그 사람의 발표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애프터이펙트에서 바디무빙이라는 플러그인을 써서 제이슨이라는 파일로 출력한 다음에 로티라는 플러그인을 써서 프레이머에서 라이브러리화한 모션 디자인을 구현해냈다는 거였어요.

조금 더 알기 쉽게 한 문장으로 축약하면 5,000줄짜리 코드를 3줄로 줄였다는 겁니다. 저런 작업을 하는 디즈니에 가면 디자이너로서 성장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디자인팀이 비교적 소규모이다 보니 제가 하는 일들이 더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Q. 계속해서 디자인 그 자체에 천착해오셨는데, 현대 산업에서 디자이너는 무슨 일을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디자인이 사이언스, 엔지니어링과 무엇이 다른지로 예를 듭니다. 우선, 사이언스는 진실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물건이 공중에서 떨어지면 어떤 에너지를 갖고 떨어지는지를 알아내고, 공식을 정립하면서 진실을 밝혀나가는 겁니다. 엔지니어링은 솔루션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봐요. 다리를 짓는다고 하면 어떤 재료와 구조를 통해 지으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둘과 비교했을 때, 디자인은 경험을 프레이밍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어딘가에 앉았을 때 사람들의 경험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요. 소파에 앉으면 편안히 기댈 수 있어야 하고, 사무용 의자에 앉으면 상체를 세워서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의자는 공동체성을 강조하고요.

디자이너는 제품과 인간이 항상 상호작용하면서 선한 루프를 형성할 수 있도록 그 틀을 제공하는 역할이라고 봅니다. 요리를 한다고 치면 사이언티스트나 엔지니어는 좋은 재료를 가져다가 여러 가지 기술로 조리하고, 디자이너는 그 맛있는 음식을 예쁘게 배치해서 사람들에게 제공해 준다고 생각해요.

Q. 디자이너가 경험의 프레이밍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어떤 소양을 갖춰야 할까요?

디자이너는 설득력 있는 취향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할 때 자기 주관을 개입시킬 수밖에 없어요. 어떤 색깔의 버튼을 어떤 위치에 넣어야 할지 등을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데, 그 결정에 설득력이 있어야 해요. 누군가 “왜 이 버튼을 그 색깔로 만들었나요?”, “왜 그 버튼을 여기에 배치했나요?”라고 반드시 물어볼 테니까요.

그때 디자이너는 근거를 분명하게 밝히면서 물어본 사람을 설득해야 합니다. 가급적 사용자들의 데이터, 숫자로 이야기하면 좋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본인만의 논리가 있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직업병처럼 일상생활 속 모든 디자인을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이유를 따져가며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Q. 디자인 툴이 예전보다 무척 많아졌는데요. 더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툴을 쓰면 좋을까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툴이 생겨날 정도로 디자인 툴의 춘추전국시대이긴 합니다. 과거에 전통적인 디자인을 해오던 사람들이 쓰던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의 독재가 끝났다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고 어떤 툴을 써서 디자인했느냐가 중요하진 않다고 생각해요. 최종 디자인을 두고서 무슨 툴로 만들었는지 물어보는 사람은 없어요. 그보다는 그 디자인을 통해 어떤 생각을 담고 싶었는지, 사용자에게 어떤 편의를 제공하려고 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론적으로 어떤 툴이어도 좋으니 정적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툴 하나, 동적인 디자인을 할 수 있는 프로토타이핑 툴 하나 이렇게 딱 두 개만 내 무기로 삼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 기존의 툴이 마음에 안 들어서 새로운 툴을 쓰고 싶다면 그래도 돼요. 툴들 사이에 공통점이 많이 있어서 일러스트레이터의 펜 툴이나 사각형 툴, 패스파인더 같은 개념만 알고 있어도 금방 적응할 수 있으니까요.

Q. 디자이너로서 앞으로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가 브런치에 앞으로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써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이 남들보다 더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단지 제 일을 조금 더 잘하고 싶다는 쪽에 더 가까워요. 하나의 디자인을 했을 때, ‘아, 이건 내가 봐도 잘했다’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어깨를 토닥일 수 있는 수준까지 가보고 싶습니다.

그 경지에 가기 위해서 두 가지 요소를 갖추고 싶어요. 첫 번째는 어떤 플랫폼에서도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디자인 역량, 두 번째는 제 디자인을 남들에게 더 잘 어필하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혹은 스토리텔링 능력이에요.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나도 어느날 갑자기 ‘나 오늘 훌륭한 디자이너가 된 것 같아’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아요. 언제나 현재의 상태와 이상적으로 여기는 미래의 상태 그사이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눈앞에 주어진 것에 충실하며 해나가면서 어제보다 더 나은 디자이너로 거듭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 본 인터뷰는 한승헌 님이 디즈니의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재직 중인 2018년에 진행되었습니다. 현재 한승헌 님은 구글에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 근무 중입니다.

한승헌 디즈니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영상으로도 만나보세요.

 

글·편집 김정원

melo@eoeoeo.net

EO(Entrepreneurship & Opportu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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